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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잃어버린 대릉원: 달성고분군은 무엇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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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ongrok Lee
대구 달성고분 복원 프로젝트 1 부
대구의 잃어버린 대릉원: 달성고분군은 무엇이었나

대구 도심 한복판, 달성공원(달성토성) 주변에는 한때 ‘87 기’의 봉분이 기록된 거대한 무덤지대가 있었습니다. 오늘날엔 주택·원룸촌과 도로 아래로 대부분 사라져 지상에서는 거의 식별하기 어렵지만, 20 세기 초 조사기록과 출토 유물 기록은 이곳이 단순한 ‘동네 언덕’이 아니라 대구 분지의 중심 지배층을 상징하던 대형 묘역이었음을 되짚게 합니다.
이 시리즈의 최종 목표는 단순한 “유적 소개”가 아닙니다.
도심 매장유산(땅속 문화재)을 더 이상 ‘조용히’ 잃지 않기 위한 정책 제안과 커뮤니티 제안까지, 6 부에 걸쳐 현실적인 로드맵을 세우는 것이 목표입니다.
우선 시작하기에 앞서, 고분이 보존된 경주 대릉원의 사진과 달성고분이 지하 깊숙히 묻혀있는 비산동 일대의 항공 사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0) 핵심만 먼저 요약하면
- 달성고분군은 대구 서구 비산동·내당동 일원의 구릉(해발 40~50m 내외)에 분포했던 고분군이며, 지형·배치에 따라 7 개 분포군으로 나뉜다는 정리가 있습니다.
- 1923 년 택지 조성 과정에서 다수 고분이 파괴되었고, 이를 계기로 일부 고분이 발굴되며 지표에 남아 있던 ‘총 87 기’가 측량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 조성은 3 세기 중엽 무렵부터 시작해 5 세기 중엽 전후 ‘고총(대형 봉토분)’ 조영이 본격화되는 흐름으로 이해됩니다.
- 금동관·환두대도(고리자루큰칼)·금제 귀고리·말갖춤 등 위세품 기록은, 이곳이 지역 최고 지배층에 가까운 장송 공간이었음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1) 달성고분군은 어디에 있었나: “달성토성 옆, 해발 40~50m 구릉의 묘역”
달성고분군은 대구광역시 서구 비산동·내당동 일원, 해발 40~50m 내외 구릉지에 분포했던 고분군으로 정리됩니다. 그리고 지형과 고분 배치 양상을 기준으로 7 개의 분포군(군집)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연구 정리도 있습니다.
이 포인트가 중요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성(城)과 무덤이 ‘옆에 붙어’ 있다는 구조는, 그 자체로 이 공간이 우연히 형성된 공동묘지가 아니라 정치 거점과 결합한 묘역일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한 줄 문장(블로그용)]
“달성토성 바로 옆 구릉에 ‘무덤 군(群)’이 붙어 있었다는 사실은, 이곳이 권력의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Q_Aj1s4Ep5I
2) “87 기”의 봉분: 기록 속 ‘도심형 대형 고분군’
달성고분군이 ‘대구의 잃어버린 대릉원’이라 불릴 만한 이유는, 도심 한복판에 거대한 봉분군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숫자’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연구에 따르면 1923 년, 택지 조성을 위한 토사 채취 과정에서 다수 고분이 파괴되었고, 그 일을 계기로 일본인 조사자들에 의해 일부 고분이 발굴 조사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지표에 남아 있던 총 87 기의 고분이 측량되어 봉분 규모와 위치를 대략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달성고분군은 “지금 없으니 없던 유적”이 아니라,
있었고(=87 기 측량), 파괴가 시작되었고(=토사 채취), 그 흔적을 기록이 붙잡아 둔 유적입니다.
“이 숫자(87 기)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도심에서 사라진 매장유산’을 추적할 수 있게 해주는 좌표다.”
3) 5–6 세기 신라 고총 고분군으로서의 성격: “3 세기부터 시작해, 5 세기에 정점”
달성고분군을 ‘5~6 세기 신라 고총 고분군’으로 말할 때,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1) 조성의 시간폭이 길다
국문초록 정리에 따르면 달성고분군의 편년 범위는 3 세기 중엽 전후부터 6 세기 후엽까지로 제시됩니다.
(2) 그중에서도 “고총(큰 봉토분)”이 본격 조영되는 시점이 있다
같은 정리에서 5 세기 중엽이 되면 37·41·50·51 호분 등이 속한 군을 비롯해 각 군에서 고총 조영이 본격화된 것으로 판단합니다.
“달성고분군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무덤밭이 아니다.
3 세기부터 축조가 시작되고, 5 세기 무렵 ‘큰 무덤(고총)’이 집중적으로 만들어지는 정점을 맞는다. 그리고 6 세기대로 넘어가면 묘제와 규모가 또 달라진다. “


이렇듯 다양한 시간대의 유물이 나옴으로써, 같은 지역의 삼국시대 문화-생활 발전사를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무덤의 ‘급’을 말해주는 것: 금동관과 무기, 마구
달성고분군은 ‘큰 무덤’이라는 외형만 거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아 있는 출토 기록에는 권력과 위신을 과시할 수 있는 위세품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37 호분 1 곽에서는 토기류와 함께 금동관, 환두대도(고리자루큰칼), 금제 태환이식(귀고리), 그리고 재갈·행엽 등 마구(말갖춤)가 출토된 것으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건 “유물이 화려하다” 수준을 넘어, 달성고분군이 지역 최고 수장층(또는 그에 준하는 지배층)의 장송 공간이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입니다.
[이미지] 금동관/환두대도/마구류(재갈·행엽) 대표 이미지(박물관 소장품 혹은 보고서 도면)

5) 달성토성과 ‘한 세트’였던 묘역: 달구벌 중심의 권력 풍경
달성고분군의 위상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달구벌(대구 분지) 중심 집단의 권력 풍경이 ‘성곽(달성토성) + 묘역(달성고분군)’으로 한 자리에서 맞물려 있던 복합 유산”입니다.
연구에서는 문헌기록 등을 통해 3 세기 중엽 ‘달성’을 축조한 세력이 달성고분군을 조영했고, 300 년 이상 대구지역 중심 집단의 묘역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달성공원 일대는 단일 유적이 아니라,
- 고대의 성곽(달성토성)
- 고대의 지배층 묘역(달성고분군)
- 근대 도시공원으로의 전환(일제강점기 이후)
- 현대 도시공원 시설
이 층들이 겹겹이 쌓여 있는 복합 유산군이기도 합니다.
여기서부터 이 시리즈가 ‘복원’과 ‘활용’을 동시에 말하는 이유가 선명해집니다.
달성은 유적이면서 동시에 지금도 시민이 매일 지나다니는 생활공간이기 때문입니다.
6) 대구 분지 안에서의 위계: “여러 고분군 중, 중심축은 달성”
대구 지역에는 달성고분군 외에도 대명동, 구암동, 다사 문산리·죽곡리, 화원 성산리 등 고총(직경 20m 이상) 규모가 확인되는 고분군 분포권이 거론됩니다.

그럼에도 달성고분군이 ‘중심축’으로 반복 호명되는 이유는, 단지 봉분 수가 많아서가 아닙니다.
연구는 달성고분군을 “대구지역 중심고분군”, “지배층의 묘역”으로 보고, 출토 금속유물과 고분 규모 등을 근거로 대구 지역의 핵심 묘역으로 평가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대구 분지에는 ‘거점급 무덤군’이 여러 곳에 동시에 존재한다.
그러나 달성고분군은 달성토성과 결합해 있고, 조성 시기와 위세품이 보여주는 정치적 중심성이 특히 뚜렷하다.
7) [정책 시리즈의 방향] 왜 도심 매장유산은 ‘지도·제도·예산·거버넌스’가 없으면 계속 사라지는가
달성고분군은 지금 지표에서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연구도 “현재 지표상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표현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음’은 ‘없음’과 다릅니다. 문제는, 도심 매장유산이 지도(어디에 남아 있는지) 없이 계획에 반영되지 않고, 제도(규제·보호의 틀) 없이 개발 인허가의 사각지대에 놓이며, 예산(조사·보존·해석의 돈) 없이 구제발굴로만 대응하고, 거버넌스(누가 책임지고 조정할지)가 부재하면—결국 유산은 “발견될 때마다 조금씩”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표지판 몇 개, 산책로 하나’로는 부족합니다. 실제로 달성고분군을 ‘대릉원 스타일’로 되살리려면, 먼저 경계와 잔존 범위를 재설정하고(지적/GIS+비파괴 조사), 그 다음 선택적으로 조사·안정화한 뒤, 마지막에 공원 경험을 설계하는 단계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제안도 나옵니다. 이 시리즈의 후반부(5 부·6 부)는 바로 이 지점—“사라지지 않게 만드는 시스템”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로 이어집니다.
“대구 서구청은 이 부지에서 공사를 진행해도 무방하다는 문화재조사연구단 의견에 따라 건축을 허가했고, 사업 시행자는 지난 2 일 소매점 신축 공사를 시작했다. 서구청은 90 일간 출토유물 현황을 공고할 예정이다. 공고 기간 소유자가 나타나지 않을 시 매장문화재는 문화재청에 귀속된다. 출처 : 대구신문(https://www.idaegu.co.kr)”
이렇듯 현재 지방정부의 문화재에 대한 이해는 전무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8) 2 부로 넘어가는 질문: “87 기의 봉분은, 어떤 과정을 거쳐 사라졌나?”
여기까지가 1 부의 결론입니다.
달성고분군은
- 도심 안에 존재했던 대형 지배층 묘역이었고,
- 1923 년 ‘토사 채취’라는 개발 행위를 계기로 파괴와 조사가 얽히며 기록이 남았고,
- 3 세기부터 6 세기까지 이어진 장기 조성, 특히 5 세기 무렵 고총이 집중된 고분군이었다는 점이 확인됩니다.
그런데 질문은 하나로 수렴합니다.
“87 기”라는 숫자가 분명히 적혀 있던 그 고분군은,
왜—그리고 어떻게—도시 지도에서 지워졌을까?
다음 편(2 부)에서는 1923 년 이후 지금까지, 달성고분군이 사라져 온 ‘훼손 연표’를 따라가 보려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국내·해외(일본 포함)에 흩어진 ‘달성고분 관련 유물’의 행방도 함께 추적해 보겠습니다.)

87 기에서 몇 기로.
“사라진 건 봉분만이었을까, 아니면 우리가 지킬 방법이 없었던 걸까?”
2 부에서 이어집니다.
참고(초안 기준, 추후 보강 예정)
- 남익희, 「대구 달성고분군의 편년과 성격」(2020): 1923 년 조사 경위, 87 기 측량, 분포군/편년, 출토 위세품 정리 등 핵심 근거
- 『嶺南文化財硏究』 제 23 집(2010) 수록 논의: 대구지역 고총 분포권(달서/대명동/구암동/성산리/문산리/죽곡리 등)
- (프로젝트 참고문서) Restoring and Urban-Parkifying the Daegu Dalseong Tumulus Cluster: “단계적 복원” 접근, 지도/GIS 기반 재설정의 필요성 (git-rok-cyb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