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note
대구 달성고분군은 무엇이었나
대구 도심에 존재했던 달성고분군의 조사 기록과 고고학적 성격을 살피고, 현재 공개 자료만으로 말할 수 있는 범위와 남은 질문을 구분한다.
이 글의 목차
달성고분 리서치 노트 1 · 공개된 연구와 보도자료를 다시 읽은 개인 조사 기록이다. 현재 유구의 보존 상태나 복원 사업의 타당성을 판단하는 보고서가 아니다.

대구 달성공원 주변, 지금의 서구 비산동·내당동 일대에는 여러 시기에 걸쳐 조성된 고분군이 있었다. 오늘날 지표에서는 대부분 식별하기 어렵지만, 1923년 조사에서는 당시 지상에 남아 있던 봉분 87기의 위치와 규모가 기록됐다.
이 글은 세 질문에만 답하려 한다.
- 87기라는 숫자는 무엇을 뜻하는가?
- 조사된 무덤과 출토품은 어떤 집단을 보여주는가?
- 현재 공개 자료만으로 무엇까지 말할 수 있는가?
먼저 구분해야 할 사실
- 87기는 현재 남아 있는 무덤의 수가 아니라 1923년 조사자가 지표에서 확인한 봉분 수다.
- 조사된 고분의 시기는 대체로 3세기 중엽 전후부터 6세기 후엽까지로 정리된다.
- 금동관, 큰 칼, 귀고리와 말갖춤은 일부 무덤의 피장자가 지역 유력 집단과 연결됐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 지표에서 봉분이 보이지 않는다고 지하 유구까지 모두 사라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 반대로 과거 분포도만으로 현재 유구가 남아 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현재 상태는 현장 조사 자료가 필요하다.
달성토성 옆에 조성된 묘역
달성고분군은 달성토성 남서쪽의 비산동·내당동 일대 구릉에 분포했다. 연구에서는 지형과 고분 배치를 기준으로 여러 분포군을 구분한다. 성곽과 묘역이 가까웠다는 사실은 두 공간의 관계를 검토할 이유가 되지만, 하나의 계획 아래 조성됐다는 증거는 아니다.

이 도면은 과거 조사 지점과 분포군을 이해하는 자료다. 현재 지적도나 지하 유구의 보존 상태를 직접 보여주는 지도는 아니다.
‘87기’라는 기록이 뜻하는 범위
1923년 택지 조성과 토사 채취 과정에서 고분이 훼손되며 달성고분군이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남익희의 2020년 연구는 당시 조사와 이후 출토 자료를 종합해 고분군의 편년과 분포를 다시 검토한다.
87이라는 숫자는 조사 당시 지표에서 식별된 봉분의 수다. 발굴되지 않은 무덤을 포함한 전체 규모나 현재 잔존 수와 같지 않다. 따라서 이 숫자는 “정확히 87기가 있었다”는 최종 집계보다 도시화 이전 경관을 추정하는 기준점으로 읽는 편이 안전하다.
3세기에서 6세기까지의 변화
남익희의 연구는 조사된 고분의 시기를 3세기 중엽 전후부터 6세기 후엽까지로 정리한다.
- 목곽묘: 나무로 널방을 만든 무덤으로, 비교적 이른 단계에 나타난다.
- 고총: 규모가 크고 높은 봉분을 가진 무덤으로, 연구는 5세기 중엽부터 여러 분포군에서 조성이 본격화됐다고 본다.
- 석실묘: 돌로 널방을 만든 무덤으로, 6세기에는 중소형 고분과 함께 비중이 커진 것으로 해석한다.
이 시간폭은 달성고분군이 한 시기에 만들어진 단일 묘지가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 변화한 묘역이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다만 각 분포군이 같은 정치 집단에 속했는지, 집단 관계가 시기별로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추가 자료가 필요하다.
출토품이 보여주는 범위
37호분을 비롯한 조사 기록에는 금동관, 환두대도, 금제 귀고리와 말갖춤이 등장한다. 환두대도는 손잡이 끝에 고리 모양 장식이 있는 큰 칼이고, 행엽은 말의 가슴이나 엉덩이 쪽 장식으로 쓰인 말갖춤이다.
이런 물건은 모든 무덤에서 일반적으로 확인되는 부장품이 아니다. 무덤 규모와 함께 보면 일부 피장자가 지역 유력 집단에 속했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달성고분군 전체를 하나의 최고 지배층 묘역으로 규정하거나 경주 대릉원과 같은 정치적 위상으로 볼 수는 없다.
2019년 보도가 남긴 질문
대구신문의 2019년 보도는 비산동 일부 조사에서 5~6세기 유적 5기와 유물 18점이 확인됐고, 조사단 의견에 따라 공사가 진행됐다고 전한다.
이 기사 한 건만으로 당시 법적 절차가 충분했는지, 보존 판단이 적절했는지 평가할 수는 없다. 발굴조사 보고서, 심의·협의 기록과 현재 부지 상태가 함께 필요하다. 이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도심 개발 과정에서 고분군 관련 자료가 계속 발견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판단 과정을 이해하려면 기사보다 더 구체적인 기록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정책 제안 전에 필요한 자료
현재 자료만으로 특정 부지의 보존, 복원 또는 공원화를 제안하기는 어렵다. 먼저 다음 자료를 확보해야 한다.
- 과거 조사 지점과 현재 지적도를 연결한 위치 정확도
- 발굴조사 보고서와 유구별 보존 상태
- 토지 소유와 현재 이용 현황
- 현행 개발 전 조사·심의 절차와 공개 범위
- 주민, 토지 소유자, 조사기관과 지자체의 이해관계
- 비파괴 조사로 확인할 수 있는 범위와 한계
이 정보가 있어야 기록 보존, 현지 보존, 이전, 표시 방식 또는 추가 조사 가운데 무엇을 검토할지 논의할 수 있다.
비교 자료를 사용할 때의 주의

이 사진은 대구와 연결된 신라 양식 말갖춤의 비교 자료다. 정확한 출토지가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달성고분군의 부장품을 직접 보여주는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 앞으로 국내외 소장품을 연결하려면 유물명, 소장번호, 출토지, 수집 이력과 원보고서를 각각 확인해야 한다.
다음 조사 질문
- 1923년 측량도와 현재 지적도를 어느 정도 정확도로 연결할 수 있는가?
- 2019년 조사 지점의 발굴보고서와 심의 기록은 공개되어 있는가?
- 발굴되지 않은 구역의 잔존 가능성을 비파괴 조사로 어디까지 확인할 수 있는가?
- 달성고분 출토품의 소장 이력과 공개 이미지를 어떤 기준으로 연결할 것인가?
- 보존과 재산권·주거환경 개선이 충돌할 때 어떤 절차로 판단해야 하는가?
다음 글은 이 질문 가운데 원자료로 답할 수 있는 항목이 생겼을 때 이어갈 예정이다.
참고자료
- 남익희, 「대구 달성고분군의 편년과 성격」, 『야외고고학』 37, 2020, 5–31쪽. KCI 원문 정보 및 초록, DOI: 10.35347/jkfa.2020..37.5
- 대구신문, 「달성고분군서 삼국시대 유적 발굴」, 2019년 10월 22일. 기사 원문
- 매일신문, 「달구벌의 뿌리 달성공원-(중) 잊혀져 가는 달성 고분군」, 2004년 3월 24일. 기사 원문
- 대구광역시 서구, 「대구달성」. 공식 문화유산 안내
출처 링크와 서지 정보는 2026년 8월 3일 확인했다. 외부 도판과 전시 사진은 위의 캡션에 표시한 범위에서만 사용해야 한다.